오래된 사진들

2011. 3. 8. 01:27옷/이야기


 기성복이 주류가 되기 전, 대략 60년대 후반 이전의 사진들을 보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옷차림은 그리도 근사하다. 특히 개화기 언저리를 살던 한량들의 차림새는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다. 사진찍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그들은 정성을 다해 옷차림을 갖추고 사진기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오래된 사진 속의 그들은 우리의 초상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분명 로컬라이징이 좋긴 하다만 이용과 오용은 다르다는 점도 분명하다. 어설픈 오용 없이 만들어진 남성복들. 그리고 그것을 성의있게 차려입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멋진 과거는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길이에 턴업 폭을 넓게 잡았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배운 스타일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기성복이 지배하는 시절이 오기 전에는 이런 형태가 주류였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복을 입었다는 서광범. V존 깊이가 높은 고전형 영국식 수트를 입고 포켓 스퀘어를 꽂았다. 어깨선은 과장 없이 자연스러운 형태. 


 개화기의 가족 사진. 서광범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재킷 V존의 고지가 높다. 바지는 착석 상태에서 이 정도로 올라서는 것으로 보아 기상시 브레이크가 없는 길이일 것이다. 베일 것처럼 잡은 주름도 인상적. 셔츠와 타이의 조합도 흥미로운데, 윙 칼라와 프렌치 커프스를 갖춘 턱시도 셔츠에 보타이를 맸다. '사진을 찍음' 이란 중요한 일을 위해 충실히 갖춘 착장. 오늘날에는 조건과 결과 모두 생경하기만 하다. 


서재필 선생님. 볼드 윙 칼라 셔츠에 넥타이 매듭을 아주 두툼하게 묶었다. 재킷은 봉긋하게 솟은 로프드 숄더와 더블 브리스트. 앞선 사진들이 영국풍이었다면, 이쪽은 괜스레 이탈리아 스타일로 보인다.  


 서광범과 김옥균. 서광범은 근사한 잉글리시 컨트리 스타일로 차려 입었다. 큼지막한 라펠이 달린 더블 재킷과 베스트, 트라우저의 스리 피스가 정갈하면서도 편안해 보인다. 두툼해 보이는 것이 어쩌면 트위드일지도 모르겟다. 호스 길이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것으로 보아 승마를 하고 온 듯 싶다. 자랑하려는 듯, 하지만 정확하게 매단 회중 시계 끈이 이채롭다. 


 40년대 정주영 회장(뒷줄 중앙). 물론 기능성 원단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긴 하다만, 셔츠에 니트 베스트를 겹쳐 입었다. 함께한 동료들을 보면 테일러드 재킷을 입은 사람도 있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마치 니커보커즈 같은 바지에 호스를 신은 사람도 있다.  


 일제 강점기의 결혼식. 신랑과 친구들은 스리피스 연미복을 갖춰 입고 윙 칼라 셔츠에 보타이를 맸다. 부토니에와 장갑도 빠트리지 않았다. 신랑에게만 허락된 하얀 보타이와 세퍼레이트 트라우저도 눈여겨 볼만 하다.


 박헌영 선생님의 가족사진. 눈여겨 볼만한 점은 피크드 라펠 재킷인데, 근래에 네로우(폭이 좁은) 피크드 라펠을 단 싱글 브리스트 재킷이 다수의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출시되면서 피크드 라펠이 젊고 참신한, 혹은 경박하고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디자인으로 오해받곤 한다. 본디 피크드 라펠은 더블 브리스트 재킷에서 정석이며, 싱글 브리스트 재킷에서도 너치 라펠 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쓰였다(단 네로우 라펠은 아무래도 모즈 수트와 함께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쪽도 꽤 예전 일이긴 하다만).  


 여운형 선생님. 윙 칼라에 플레인 노트로 묶는 타이. 스리피스 수트. 홈버그를 쓰고 오버 코트까지 입었다. 거기에 공들여 다듬은 카이저 수염으로 방점을 찍었다. '성장' 이란 이런 옷차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