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 이야기

2011. 5. 9. 02:21옷/이야기


1. 처음으로 좋은 면도기를 탐하게 된 때는 군대있을 때였다. 그때까지는 면도를 잘 안할 뿐더러, 아버지께서 쓰시다 남긴 도루코 1회용 면도기로 대충 쓰곤 하였다. 이런 생활이 한동안 이어지다, 생지옥이었던 해안소대에서 지방청으로 전출을 가 생활의 안정을 되찾고나니 미용(그루밍이라 하던데?)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써보게 된 선임의 '질레트 마하3'. 면도에도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하나 구매했으니 여분의 날까지 무려 만 몇천 원을 들였다. 당시에는 '농심 사천짜장' 구매비 정도로나 적합한 고가였다. 그리고 얼마간 하루하루 '면도하는 기쁨' 이란 것을 즐겼다. 세상 천지에 이렇게 수염이 잘 깎인다니.

2. 전역한 날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와 더블백을 풀고 보니 면도기는 없었다. 편의점에서 똑같은 물건을 구매했다. 약간의 기능이 추가된 후속작이 나와 있었지만, 본디 쓰던 물건이 좋으면 줄창 쓰는 버릇이 있어 똑같은 물건을 샀다. 다만 이전의 구매 평가로 보아 여분의 날은 그다지 필요없을 것 같아 기본 구성만 구매했다. 그리고 쭉 썼다.

3. 한 6개월정도 쓴 것 같다. 날이 무디어 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왠만하면 그냥 쓰겠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달아 수염보다 각질이 더 많이 긁혀 나왔다. 당장 날을 교체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에선 당연하련만, 또 다른 버릇인 '내일 하지 뭐' 때문에 마냥 미루었다. 그 동안은 다시 '아버지가 쓰다 둔 도루코 1회용 면도기'를 썼다. 물론 만족도가 이전만 못하긴 했다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당시 난 이런저런 일에 치여 면도에 퀄리티를 추구할 정도의 상황이 못됬다. 혹은 많이 게을러져 있었다.

4. 여성지 만큼은 못되지만 남성지도 간간히 생활에 요긴한 부록을 준다. 대개의 경우엔 그 달은 "부록을 사니 잡지를 덤으로 주네" 정도의 물건이 첨부된다. 아마도 2010년 8월이었을 것이다. 에스콰이어에서 '쉬크 콰트로' 면도기를 주고 있었다. 이전부터 면도기 날을 사야한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면도기 날 팩을 사는 값에 조금만 보태면 새로운 면도기와 잡지를 살 수 있기에 그 쪽을 택했다. 그리고 이게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5. 면도는 이틀에 한번정도 한다. 수염이 나는 부분이 많지 않으며, 자라는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어서 이틀에 한번이면 충분하다. 가끔은 사흘에 한번꼴로 한다. 가끔은 수염이 조금 난 얼굴이 괜찮아 보여 쭉 기른다. 그러다 "난 참 수염이 멋없게 나는구나" 를 깨닫고 원래의 주기로 되돌아온다. 중학동창 임정준은 그때도 수염이 덮수룩했으니, 마치 게임 '철권'의 케릭터 '폴을' 연상시키는 정도였다. 늘 그렇게 수염이 나지 않음에 감사하면서도, 가끔은 근사한 수염이 나지 않음을 한탄한다. 여튼 면도는 이틀에 한번만 한다. 이전에 매일했던 적이 있는데 별 티도 안나면서도 잔 여드름만 늘었던 기억도 있어 제한하는 의미도 있다.

6. 쉬크 콰트로는 참 좋은 면도기다. 일단 잘 잘리며, 안전망이 있어 나름의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4월까지 무려 8개월을 줄창 썼건만 날의 상태가 건강하단 점이 만족스럽다. 면도날은 나름 비싸다. 게다가 1개만 구매할 수는 없고 적어도 4개는 사야 한다. 덕분에 손이 안가게 되는데 그런면에서 면도날의 수명이 길다는 점은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다. 물론 면도주기가 길고, 수염이 적으며, 수염이 거칠지 않다는(이것도 자랑이 될런지는 모르겠다만 내 수염은 참 '양질' 이다) 제반사항이 있긴 하다만, 쉬크 콰트로는 긴 기간동안 잘 버텨 주었다.

7. 그 사이에 다른 면도기를 병행했던 적이 있긴 있다. '도루코 Pace 6' 의 1회용 판이 있어(=날 교환이 안되는) 궁금한 마음에 써본 적이 있다. 6중날인 만큼, 그리고 기술력이 충분한 업체인 만큼 절삭력 하나는 끝내줬다. 그다지 손에 토크를 주지 않고 한번만 "슥~" 밀어도 후련하게 깎여나갔다. 한동안 만족하며 썼는데 면도날의 수명이 문제가 되었다. 콰트로와 병용하며 썼건만 대략 4개월만에 날이 많이 무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1회용이다 보니 개선의 여지는 없었다. 폐기하고 다시 콰트로 단독 운영 체제로 돌아왔다. 

8. 한 때는 쉐이빙 폼을 썼었지만 다들 박하향이어서 그 특유의 발산되는 느낌이 거슬렸다. 면도 후에도 남는 그 느낌. 누구는 시원해서 좋다고 하지만 각종 피부 트러블로 진창인 내게는 또다른 트러블 유발 물질로만 치환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동안은 쉐이빙 젤을 썼었다. 처음에는 만족스러운 듯 싶었으나 쓰다보니 "이걸 도대체 왜 바르는 것일까" 란 의구심이 들었다. 면도의 전개과정에서 하등 도움이 안된다는 평가 후 역시나 내쳤다. 지금은 그저 클렌징 폼을 조금 더 바르고 깎는다. 이 편이 간편하고 만족스럽다.

9. 늘 동네 가장 싼 미용실을 애용하지만 예전에 어쩌다 이발소를 간 적이 있다. 제법 오래되었고, 연륜과 스탠다드가 있는 곳이었다. 그 때는 단정한 머리가 필요하여 찾았다. 이발사 선생님께서 면도도 할 것인지를 물어보아 무심결에 했다. 그리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경험을 얻었다. 일단 턱선대로 스팀 타올을 올려두어 모공을 열고, 쉐이빙 폼을 곱게 개어 솔로 얼굴에 발라주셨다. 그리고 가죽띠(야스리 용도를 하는 것인데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에 몇 번 쓱쓱 긁은 외날 면도칼로 '섬세하지만 호쾌하게' 쉐이빙 폼을 긁어냈다. 그리고 돌비누와 함께 한 세안. 결과의 질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집에서 콰트로와 함께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원체 무딘 성격이며, 면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만큼 수염이 불편한 타입은 아니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절도있으면서도 물 흐르듯 흐르는, 동시에 시, 청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은 가히 '아르테' 라 부를만 했다. 그 면도는 평생을 통틀어 손에 꼽히는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들 중 하나로 내게 남았다. 그리고 단정은 하지만 매우 고루한 헤어스타일과 만 오천 원의 카드 명세서도 남았다.

10. 서울에 체류한지 두 달을 바라보고 있다. 본가에 콰트로를 두고 와 그 동안은 '외삼촌이 쓰다 남긴 도루코 1회용 면도기'와 함께 했다. 아까 집에 돌아와 면도를 하다 갑자기 좋은 면도기를 하나 더 들여보고 픈 충동이 왔다. 콰트로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최근의 기억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절삭력이 이전만 못했으며, 당시에도 새로운 면도기에 대한 욕구를 느꼈었다. 여기에 면도기를 가져오려 본가에 내려갈 수는 없다는 조건까지 결부되면서 아주 적절한 구매 사유가 완성되었다. 내일은 새 면도기를 하나 장만해보려 한다. 요즘 편의점에 가면 바이브레이터 기능도 겸하는 면도기들이 많던데, 그 중 하나를 들여 과연 '면도의 만족' 이란 명제에 얼마만큼 기여할지를 느껴보련다. 불행한 것은, 전자의 용도로 쓸 일이 없다는 점이다.

11. 가끔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에서 나오는 소프 바(비누라고 쓰면 안될 것 같다)로 만든 거품을 오소리 털로 된 브러쉬로 발라 흑단나무 손잡이가 달린 면도기로(그래봐야 날은 질레트지만) 면도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좋을 것이다. 다만 면도의 본질은 도구의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그리고 인생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는 행위에 얼마만큼 공을 들이는 것이 적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기에, 무엇보다도 그런 도구를 갖춘 '자가' 면도가 과연 숙련된 전문가가 해주는 면도에 필적할 수 있을 것인지가 의심스럽기에 실천에 옮기지는 않고 있다.  아무리 연장이 좋아도 기술이 좋은 것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게 내 수많은 지론(겸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로 남겨져 있다. 이런 핑계(?)들 덕분에 자주하는 무리한 소비가 면도에까지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참 다행이다.

12. 이러나 저러나 면도는 계속된다. 수염 탈모증에 걸리거나, 두 팔이 다 부러질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꼭 새 면도기를 사야겠다. 이번에는 미루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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