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마틴 빈티지 1461 / Dr. Martens Vintage 1461
2010. 11. 7. 23:19ㆍ옷/옷장
풍모에서 느껴지듯이, 꽤 오래 신었다. 쉽사리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크게 모자람도 없어 영욕의 세월을(그래야 꼴랑 2년) 함께 할 수 있었다. 봄바람 불고 해가 쨍할 때 캐시미어 블렌딩 슬랙스를 입고 신은 적도 있고, 진눈개비가 몰아칠 때 낡아 빠진 데님 팬츠를 입고 신은 적도 있다. 신을만큼 신어보고 느끼는 감상이다. 귀납적으로, 양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톤의 붉은색을 표현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와인 레드라고 하거나, 검붉다고도 하고, 버건디라고도 하며, 메트릭스의 네오라면 '492624' 라고 읽을 것이다. 무어라 불러도 문제될 건 아니다. 다만 닥터 마틴은 옥스 블러드 컬러라고 한다. 그렇다고 설마 소 선지를 여기에 처바르지는 않았겠지...
이 정도 명도의 색상군을 좋아한다. 초록색도 그렇고, 파란색도 그렇고. 대략 초록색은 '브리티쉬 그린' 이 되고, 파란색은 '네이비' 가 된다. 이탈리아식 '쨍한' 색에 비하면 이 정도 톤 다운된 색은 착장 구성이 중후하지 않더라도 진중함과 강건함의 여지를 남겨둔다. 그리고 발랄함은 더하지만, 경박함은 피해간다.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색상군이며, 패턴은 좋아하나 가벼운 느낌은 잘도 피해가는 영국인들이 잘 쓴다.
구두 색 이야기로 돌아가서, 케쥬얼 코디네이션에서 이런 버건디 컬러는 참 매력적이다. 비교적 자주 쓰이다 보니 안정적인 선택이면서도 비교적 참신하다. 갈색 계통의 색상들이 정석적이긴 하나 말 그대로 정석이다 보니 천편일률적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버건디 컬러는 참신한 선택이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톤 다운된 색이다 보니 왠만한 코디네이션에는 두루 잘 어울린다. 데님에도, 울에도, 코듀로이에도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버건디 베이스는 에이징의 과정도 매력적이다. 옅은 갈색이 변해가는 것만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오염, 구두약, 일광의 조합으로 변해가는 색상은 두고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다른 가죽과 마찬가지로 톤은 점점 어두워지며 중후함을 얻어간다. 2년정도 지난 이 시점에선 새 물건의 색미보단 훨씬 그럴싸해졌다. 물론 원체 무두질이 이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보니 충실히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나쁠 건 없다. 처음 '닥터 마틴의 구두' 기대했던 수준은 넘는다. 역시 가죽 제품은 왠만해선 오래 써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착화감과 외관의 벨런스는 참 어렵다. 구두가 지켜야 할 외관의 덕목을 사수하면서도 착화감을 좋게 만드는 것. 구두란 장르가워낙 오래됬다 보니 그 헤리티지를 깨지 않으면서 착화감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은 구두 업체들의 어려운 과제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계 브랜드들, 대표적으로 락포트같은 업체에선 아웃솔에 에어 조던같은 에어가 드러나 있는 기상천외한 구두가 나오기도 한다. 다만 아무래도 그것을 온전한 구두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착화감을 위해 포기한 구두 외관의 덕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구두' 의 문법을 따라 만들어졌기 보다는 '신발' 의 문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닥터 마틴 3홀 계열은 착화감 향상을 위한 장치들을 갖추면서도 플레인 토의 형태를 크게 어긋나지 않고 있다. 스폰지와 빈공간으로 구성하여 쿠셔닝을 갖춘 독자적인 창(밑창 해부도 : http://justinwyatt.blog.me/130097202767)을 사용하는 점과, 굵고 성긴, 그리고 특이한 형태의 웰트 라인이 눈에 뜨이긴 하나 이 정도라면 가히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물론 정통 구두의 범주에 넣기엔 문제가 있으나 이 정도면 케쥬얼한 코디네이션의 목적엔 충분히 부합할 수 있다. 데님, 코튼, 울 등 다양한 소재로 된 팬츠에 잘 어울린다. 용기만 가상하다면, 비즈니스 수트에도 매치할 수 있겠으나 그다지 추천하진 않는다.
착화감에 집중하면, 구두의 범주에선 이만한 물건도 없다. 일단 동가격대에선 비교 대상이 없다. 시멘트 제법과 일반적인 소재를 사용한 구두와는 그 괴를 달리한다. 특히 장거리 보행에 강하고 거친 지형일수록 그 능력을 발휘한다. 근 몇 년 사이에 트래킹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데너나 레드윙 같은 브랜드가 회자되곤 있지만 그 이전만 하더라도 닥터마틴은 팀버랜드와 함께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그 위세가 크게 망가진 것은 아니다. 지론이 하나 있으니, "많이 팔리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 명성으로 보나, 실성능으로 보나 닥터마틴의 착화감은 출중하다.
다만 지론이 하나 더 있으니, "세상 어떤 구두도 운동화만 못하다" 다. 그렇다 보니 그 아무리 뛰어나다곤 하나 나이키에서 나오는 반값도 안하는 운동화(코르테즈!)보다 못한 것도 사실이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닥터마틴의 착화감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웰트 제법은 창을 교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갑피만 잘 아껴서 사용한다면, 창은 몇 번이라도 교환할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 닥터마틴은 창 교환 서비스를 하지 않다보니 동일한 창으로 교환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규품이 아닐지언정 좋은 창으로 교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은 확실한 장점이다. 내 경우, 2년 정도 신은 이 시점에서 본 창의 수명은 앞으로 길어야 1년 정도일 것으로 보이며, 창의 수명이 다하면 창만 갈아 계속 신을 것이다. 오래도록 관리잘한(혹은 마음에 들어 포기할 수 없는) 가죽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슈트리를 써 구두의 원형을 보존하며 신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굵은 주름이 잡히게 막 신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것들이 드러날 때 드디어 내 물건이 되었다는 감상이 든다. 소가죽의 무두질이 그다지 출중하지 못해 주름이 그다지 유려하게 잡힌 건 아니지만 비닐같이 구겨지는 구두들도 있다보니 이 정도면 가히 나쁘지 않다. 역시 가죽 제품은 오래 쓸 수록 멋이 짙어진다.
다 읽어보신 분이 과연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내 리뷰들 대부분은 내용이 칭찬 위주다. 그 이유라면 리뷰의 대상들에 대한 애착이 생겨서 그렇고, 애착이 생기는 건 마음에 들만한 역량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적어도 내 낮은 눈으로 보기엔 그렇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방출되었거나, 리뷰를 작성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터다. 그 노선대로, 이 구두도 제법 쏠쏠하다. 분명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 더 많으니, 그 벨런스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준이다. 비록 세간에 어린 청년들과 명동 아가씨의 필수 아이템, 혹은 유럽 극우파 폭도들의 단체복으로 비춰지는 인식이 하나 단연 말하건데, 이 구두의 진가는 제법 출중하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울릴 수 있다. 몇 년을 두고 열심히 신어둘만한 가치가 이 구두에 담겨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 그림에서 시골 아낙의 하루가 담긴 목가적 풍경이 느껴진다고 했는데(개인적으론 근대철학 최고의 개드립이라 생각한다), 이 구두를 보면 무엇이 느껴지는가? 지나가던 동생이 말했다. 사진에서 냄새날 것 같다고...
이건 덤. 플레인 라운드 토 구두엔 겉어올린 데님과 높은 양말의 조합이 가장 잘 어울려 보인다. 올 해 한참 롤업이 인기를 끌었지만, 셀비지 피니시 라인이 있는 데님 팬츠를 한 턱만 접은 턴업이 내 눈에 더 이뻐 보인다. 물론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