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와 충족

2010. 6. 28. 10:28잡문/이야기

 결국 제법 된 상황이긴 하다.  현 시점에서 패션 브랜드 간의 디자인 협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 버렸다(혹은 못미치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곤 하지만, 씬을 채우고 있는 대다수의 콜레보레이션 프로덕트들은 대단히 상식적이거나, 대단히 구태의연한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이건 필시 문제가 있다.  결국 최근 콜레보레이션 프로덕트를 소비하게끔 만드는 힘은 디자인이 아닌 브랜드 벨류에 있음을 크게 느낀다.  단적인 예로, 스투시가 30주년을 맞아 진행했던 여러 콜레보레이션 중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경우가 몇가지나 있었는가?  개인적으론 리코와 진행했던 GR-D3 모델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많은 제품들을 소비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역시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스투시+누구누구' 란 아젠다다.  그리고 그것은 단 몇글자의 이름이 얼마만큼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좌우한다.  아시다시피 이번 스투시 30주년 제품군에서 슈프림, 그리고 베싱 에이프와의 콜레보레이션 티셔츠는 여타 브랜드와의 콜레보레이션 티셔츠와 그 발매가와 프리미엄이 격을 달리한다.  백번 양보하여,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주관적 심미관에 한정한다고 할 시에 이 점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이런 전재하에 제품의 평가를 객관적 기준으로만 설정한다고 할 시 '디자인의 퀄리티' 란 기준은 평가 항목에 들어가기는 커녕 성립할 수 조차 없어진다.  그렇다면 동일한 객관 사항의 티셔츠들의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오직 '브랜드 밸류' 만이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개걸스럽게 그것을 받아먹고 있다.  사놓고 비닐포장을 뜯지도 못한 체 커뮤니티에서 위안을 얻을 리플을 구걸하면서 말이다.
 결국 하고싶은 말은 간단하다.  브랜드간의 협업의 목적은 원래의 '새로운 디자인과 각 브랜드간의 장점의 교환' 이란 내재적 지향점으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제품의 퀄리티는 별반 발전이 없으면서 브랜드 밸류란 외재적 효과에 한정한 교환과 시너지 효과 창출은 궁극적으로 기업과 소비자를 소모시키며 멍청하게 만든다.  늘 해당하는 경우우는 아니긴 하나, 라프 시몬스와 준야 와타나베의 경우 각 분야의 전문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그 브랜드에 새로운 디자인 영감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브랜드가 가진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공고하게 표출한다.  이런 활동들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그리고 원론적인 의미에서 협업은 이런 효과를 목적으로 두고 있다.  그렇다면 현시점의 씬을 채우고 있는 다수의 소위 '스트릿 계열' 브랜드들은 생각을 전환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이런 바램은 기업에 윤리적 활동을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부질없긴 하다.  굳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둘 이상의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반팔 티셔츠는 십수만원의 비상식적인 가격에도 충분히 잘 팔려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절실히 필요한 문제다.  만약 브랜드 벨류만을 교환하는 협업 풍조가 계속 이어져 나간다면 조만간 협업이란 행위 자체는 도식화 될 것이며, 이는 콜레보레이션 마켓 전반의 이미지 폭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패션 디자인에서 콜레보레이션이란 행위는 더 이상 어떠한 가치도 창출할 수 없는 시도가 될 것이다.  결국 소비자의 손에 쥐여지며 그 용도를 다해야 하는 것은 제품이지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기업에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도 자각의 필요성이 충분하다.  한 제품에 여러가지 브랜드 로고가 박힌 것에 심미적 쾌감을 느낀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옷을 입는 대상이 아닌 투자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면 역시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의복에서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이성적 회의가 필요하며, '멋있다' 라는 단어가 어떤 과정들을 통해서 도출되는 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어떠한 관점으로 의복을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주체적인 체계 설정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문제는 소비자의 소비 습관으로 인해 결정된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문제를 설정하는 권한은 아직까지 대부분 소비자에게 있다.  바로 당신이 판단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읽은 '먼나라 이웃나라' 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피에르 카르텡의 넥타이를 피에르 카르텡의 넥타이이기 때문에 산다고 읽은 기억이 난다.  결국 이 점에 문제는 기인한다.  그것이 실크로 만든 세븐폴드 공법의 타이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수로 박혀있는 로고 때문에 구입한다는 점은 그것이 비록 일상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옷을 단순한 기표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총체적인 기호로 활용할 것인가.  우리가 협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문제의식을 함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