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오.

2010. 2. 26. 04:16잡문/메모


1. 19시간을 깨어 있다가 4시간을 자고 22시간을 깨어 있었다.  커피를 여섯 잔을 마시고 긴장감이 여섯 번 팽팽해졌고, 카모마일 티를 세 잔을 마시고 긴장감이 세 번 이완되었다.  담배 두 갑이 대기오염과 암세포 유발물로 변했다.  먹은 건 입안을 헐벗게 만드는 인스턴트 뿐.  덕분에 책을 붙잡은 손가락의 혈관들이 덜컹거린다.  심장은 8000rpm으로 달리는 레트로 빅싱글이 되었다.  숨은 반 밖에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정교하고 날카롭게 보인다.  엄청나게 많은 것들, 심지어 평소엔 보이지 않던 무정형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분석되는 것과 남아있는 것들은 황량하기만 하다.  삶이란 과정을 보는 관점은 역의 관계에서 마주보는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하나를 택한다면, 난 점점 죽어가고 있다.

2. Nobody.  이 단어는 참 절묘해서, 지목하지만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용례로 읽어봐도, '없음'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만 그는 전에도 없었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없다.  하지만 말할 순 있으며 그를 규정할 수 있으며 존재하는 대상과 비교할 순 있다.  오직 추상적 언어로만 존재하는 그 사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는 아니길 진심으로 빈다.

3. 하루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 일 없이 날아가 버린 후엔, 그녀가 떠난다.  다행히 '물리적' 이지만 어디까지나 비교급에 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여기 있었기에 요번에도 그럴 것이다.  처음으로 나의 영속성이 싫어졌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변치 않는 것도 늘 좋은 건 아니다.  아니면 이런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4. 자주 놀던 친구와 사정이 있어 얼마간 만나지 못하다 오래간만에 해후했더니 너무나 많이 변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장점은(사실 아주 이기적인 관점이지만) 많이 세상에 닳아버렸다.  그 친구는 예전에도 변신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그 친구에게 실망한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이번엔 실망했다.  독야청청하게 빛나지만 서로 햇빛을 받고자 꼿꼿이 선 삼나무 숲에 걸린 오래된 덩쿨같았던 예전의 그 친구가 그립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난 결국 친구의 지금 모습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요번 달 GQ 이야기였다.

5. 피상적이다.  너무나 얇다.  톡 건들면 길게 찟겨질 것 같다.  물론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포용해야 하는 범주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예술가와 학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두 경계에 서 있으며, 그리고 그 담벽을 바탕으로 일어서 있다면, 실망스럽거나, 혹은 백번 양보해 적어도 직업 윤리를 무시하는 자세를 보여서는 안된다.  포스트 모던의 기치 중 하나가 '경계의 극복' 이긴 하다만, 그것이 질적 충족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거기서 비극과 허무가 탄생한다.  유니클로에 가면 면으로 만든 '울 터치' 타이를 판다.  얼핏 보고 설게 느끼면 기가 막히게 신기하고 이뻐 보인다.  하지만 결국 거기에 울타이는 없다.  취미가 아닌 업이라면, '울 터치' 가 아닌 '울' 이어야 한다.  물론 내가 이런 불평따위를 할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난 그 '울 터치' 타이도 샀다.  솔직히, '울 터치' 타이는 여전히 신비롭고, 난 여전히 형편없다. 

6. 친구와 동일한 레더 블루종을 구입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그와 난 참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콜드크림으로 얼룩을 지워가며 입을 것이고, 나는 인디에나 존스처럼 진흙탕에서 구르며 입을 것이다.  한 10년쯤 후에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다면 그의 나와 '같았던' 블루종을 가장 먼저보고 싶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물리적 약속'(분명 계약과는 다르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다만, 당분간은 입는 날을 격일제로 나누던가 해야 하겠지만.

7. 가계 문을 닫고, 같이 꼼장어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다 할 일이 많아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야 하는 날엔 눈가를 지나가는 풍경들이 부쩍 따뜻해진 날씨보다 10도는 냉랭해 보인다.  까페 2층 외벽에 걸린 한예슬의 사진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난 비소를 긁적거릴 기운도 없다.

8. 이런 글을 쓰지 말자고 블로그 만들 때 그렇게 다짐했으나 여기가 아니면 쓸 곳이 없다.  3월까진 할 일이 가득 차, 다이어리는 이미 이븐 바투타 여행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