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2010. 1. 18. 10:04잡문/이야기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 즉 인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과도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우가 많다.  즉, 인지할 수 없는 것이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 치환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다수의 경우에서 무의식은 의식에 늘 영향을 끼친다.  혹은, 의식을 형성하는 수단이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 구조를 말로 설명할 수 없거나, 혹은 언어의 한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종교, 오컬트, 초현상, 공포의 구조가 그것의 비현실성, 초월성을 논거를 설정하며(논리라 말하기도 무리가 있지만) 그 당위성을 확보하려 할 때 발생한다.  이건 이성의 지각과 그것이 관계하는 실증적 대상 간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현실의 인간' 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런 것들의 논리는 보이지 않는, 혹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존재함'(존재 가능성이 열려 있음도 아니다) 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이런 대상들이 우리가 존재하는 실증적 현실에 관계하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 본성은 원초적 불안을 가지고 있기에 '지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가능성' 을 열어두는 이유는 그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선조는 본디 파충류나 기타 포식자에 쫓기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런 '쫓김의 공포' 에 기인한 불안이 유전자에 각인되었고, 불안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며, 그렇기에 현실만을 지각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본성이 총체적 인간성을 통제하거나, 약점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발전하며, 스스로를 혁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이 있다.  인지할 수 '없는' 것과 인지하지 '못한' 것은 다르며, 그렇다면 여기서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이 구분을 따르면, '귀신' 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것이지 우리가 아직 인지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런 구분의 근거는 우리의 충분한 현실적 방법론으론 귀신이 성립할 수 없으며, 이 방법론을 따르면 귀신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과신이 부른 오용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 이다.

 다만 이런 구획 설정에서의 어려움은 인지할 수 없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명확하게 구분할 것인지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 때문에 불필요한, 그리고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영향력이 현실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우리의 세계를 조정하는 하늘 위의 지적 설계자이며, 나는 양자리이기 때문에 요번달에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방엔 귀신들이 울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발견하지 못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현실의 존재가 실질로 관계하는 대상을 현실의 대상에만 한정해야 한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주어져야 할 방법은 현실내에서 한정되어야 하며, 비현실적인 대상은 비현실적인 관계, 예컨데 예술의 범주에 한정해야 한다.  이런 관계 설정은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능한한' 가장 간단하게 해준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 대한 해석의 수단을 제법 건실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과학적' 이라 불리는 체계는 특수한 도약 없이 분명한 체계를 통해 세계에 작용하며, 관계맺고 있다.  이미 이런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해 그 수단을 통시적 삶에 온전하게 자리잡게 해야 한다.  과정을 도약하는 방법론은 그것이 체계로 상정되기 이전에 신화에 속한다.  그리고 그 것은 유희와 같은 비현실적 범주에 한정시켜야 하며 그것이 본연의 목적이다.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신화는 존재해선 안된다.  그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과신이 인간 이성을 유약하게 만드는 불편한 페러독스다.

 분명한 건, 인간의 역사에서 세계는 공상을 통해 읽혀진 것이 아니었고, 그점은 앞으로도 이어져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가능하나, 0%가 아니라고 해서 100%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은 확실한 것에 근거를 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눈을 뜨고 손을 내밀어 세계와 관계해야 한다.  그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취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이성이 해야할 온당한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