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2011. 5. 8. 02:13잡문/이야기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간절히 열망하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나이를 좀 더 먹은 것 때문일 수도 있고, 스스로 설정했던 대학의 범주에서 벗었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요즘의 나날들에는 이전에 상상만 하던 것들을 취하거나, 조금씩 다가서거나, 실체를 확인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다만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하다 보니 생각보단 부정적이다. 물론 상상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꽤나 근사한 일이다. 그것은 자아실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뜻한 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자아실현의 근거와 소분야로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지난 날을 성토하게 되고, 앞으로의 길을 가다듬게 된다. 분명 논리적인 구조에서만 본다면 궁금해하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상상의 나래에서 존재하던 것들은 대체적으로 그 실체보다 부풀려지기 마련이고(이것을 '기대' 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실체는 공상으로 관계하던 대상보다 외소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잘못이 크기에 자연히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상상에서 120%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접하기 전, 늘 100%로 끌어 내리려 노력한다. 다만 이런 받아들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망감을 형성시키는 경우가 있다. 바로 '120%를 기대하고 접한 것이 100%는 커녕 50%도 안될 때' 다. 제법 빈번하다. 

 서울 체류를 시작한지 40일 정도가 지났다. 이전에 있었던 목적지향의 짧은 체류와는 이번에는 장기간이 될 것이 예정되어 있기에(아마도 20년 정도?) 보다 숨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그리고 느슨한 마음으로 많은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 비교적 이전에 가졌던 맹신과 기대, 욕구와 자극이 덜어진 관점으로 대상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일의 채류기간 동안 40번은 충분히 넘을 실망을 경험했다. 일단은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의 늘었기엔 실망의 양도 늘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번꼴로 발생하는 실망은 부자연스럽게 빈번한 감이 있다. 그리고 이건 나만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사례는 정말 얼마든지 많다. 고기가 다 푸스러진 일식 돈까스, 손님보고 가라고 하는 자전거 포, 오버록 하나 제대로 못친 티셔츠, 불어서 양념과 떡이 혼연일체가 된 떡볶이, 과연 고기가 있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돈까스, 전문 샵이 아니기에 와셔 하나 못 돌린다는 자전거 포, 원단과 실이 안맞아 봉제가 뜨다가 풀어지는 티셔츠, 아무래도 떡국으로 사료되는 떡볶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서울에는 전문점이 참 많다. 내가 사는 곳에는 드문 햄버거 전문점은 지천에 널렸고, 극을 달리는 스타일의 옷만을 다루는 곳은 햄버거집 보다 네 배는 많다. 다만 전문점 간판을 걸어놓았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그 일에 능해야 하며,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아니련만 간간히 그게 안되는 곳을 만나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여기서 나는 아마츄어며, 전문점은 프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체제의 룰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다. 아마츄어는 즐거움을 위해 행위하며, 프로는 생산 수단으로써 행위한다. 양자의 차이는 돈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돈 받고 하는 일을 아마츄어보다 못하는게 어떠한 의미에서라도 당위성을 가질 수 있을까? "간지가 딱 떨어지는 다이마루 마이" 란 점원의 말이 어떻게 당위성을 얻을 수 있을까?

 물론 나를 '나' 라고 적는 이상(=신이 아닌 이상) 내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대상의 단편일 뿐이다. 주관적인 평가인 만큼 편파적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름의 변명도 있다. 일단, 내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총체가 아닌 그 단편 뿐이기에 총체, 혹은 다른 면모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내가 인지한 단편만으로 평가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주관 관점의 한계이며 어쩔 수 없는 관계의 문제다. 그저 나와 대상 모두에게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까지는 오차범위로 넘어갈 수 있으며 감안해야 하나 '변명2' 는 아무래도 문제다. 단편만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의 총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기대가 대상의 총체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총체를 파악할 수 없기에 일부만을 바탕으로 기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대략 대상 총체의 20%라 보자. 그렇다면 대상도 가진 것의 20% 정도만을 보여주면 되는데, 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대상의 역량 부족이 너무나 크다는 점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어느 면에서나 완벽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라도 좋으면 되건만 수제 햄버거란 간판 걸어놓고 페티가 냉동이니 거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이런 함량 미달의 것들이 멋진 포장과 대중의 근거없는 지지에 의해 마치 대단한 양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개똥같은 커피를 팔지만 도회적인 현대미술풍의 인테리어를 갖추면 사진을 찍고 간 블로거들이 '커피가 맛있다' 고 적는다. 그리고 대중들은 손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방문하여 진짜로 맛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다들 맛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건 참 안타깝다. 일단 똥같은 커피가 맛있다고 호도된다는 점이 안타깝고, 이로 인해 감춰지거나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 크게 안타깝다. 정말 좋은 것을 다루고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하지만 부수적인 것들이 부족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많다. 종합시장에 가면 원하는 디자인을 원하는 치수대로 샘플로 만들어주는 집들이 있다. 그 곳에 가면 저렴하게 완성도 있는 옷을 만들어입을 수 있다. 다만 접근하기 어렵고, 알려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코xxxx인' 같은 브랜드에서 자기가 생각했던 디자인과 비교적 흡사한 옷을 사게 된다. 개탄스러운 일인데 개선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접근성과 편의성, 그리고 미적 충족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바이다. 소비가 단순한 효율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면 포스트를 작성할 때 '커피가 맛있었다' 가 아닌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라고 적으면 되며, 그래야 한다. 이게 안되는 정보가 많으며(거기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도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이런 블로그가 '맛집 600위' 까지 올라갔음에 정말 미안하다) 나같은 사람들은 잘도 낚인다. 그리고 상상을 키운다. 그리고…….

 많은 것을 접하고 있는 계절이다. 그리고 많은 실망을 경험하고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도 대개의 '알게됨' 은 긍정적인 결과를 남기고, '깨달음' 으로 남아 다른 것들을 희망하게 한다. 앞으로도 많은 실망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어쩔 수 없다. 실패가 두려워 행동을 안할 수는 없고, 혐짤이 두려워 코겔을 안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위의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서울은 너무나 재미있는 곳이다. 그 점을 충실히 느끼고 있는 계절이다. 내일은 명동에 돈까스를 먹으로 갈 것이다. 그 돈까스가 맛이 있건, 없건 간에 그 집까지 간다는 점은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