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2010. 12. 17. 19:28잡문/일기는 일기장에

 더디게 가는 시간과 날쌔게 사라지는 시간이 있다.  어제는 참 빨랐지만 오늘은 더디기만 하다.  이러나 저러나 돌아보면 남는 건 흔적들 뿐.  선굵게 족적을 남기는 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담배와 술이 남긴 주름밖에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자취를 흔적으로 남기며 잊혀지기를 길망한다.  그리도 급하게 지나간 어제의 발걸음과 함께 떠나가 흩어져 버린다.

 매일을 훌쩍이는 시인이 되면, 매일을 희희낙낙 하는 광대가 되면 무거움이 조금이라도 덜하련만 매마른 고목이 된 마음은 묵직하게 탄화되어 갈 뿐이다.  울릴만큼 매정한 겨울 바람을 가로막는 코트가 있고, 미소짓게 향긋한 커피는 혀를 두른 백태 때문에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거리에 서서 지나치는 소리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다시 걸어간다.  회한도 희망도 그저 12월 17일 오후 4시란 수치앞에 고요할 뿐이다.

 학교를 장장 18년동안 다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바다가 됬던 뽕나무 밭이 다시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늘 같으려 노력했고, 늘 변화하려 발버둥 쳤지만, 결국 모든 것은 물과 같아 여울목에 고였다가도 다시 흘러간다.  그리고 구름이 되었다 개울가에 떨어진다.  순환.  참 무던한 그 말처럼.  흘러가지만 본질은 그대로 있고, 본질은 그대로지만 태두리는 잘도 바뀐다.  

 애타게 사랑했던 사람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 못난 사람을 애타게 사랑해 준 사람은 내가 알지 못했다.  그리도 맑던 하늘아래 거닐던 시간은 잊혀져 버리고, 눈물보다 무거운 고민으로 뒤척이던 밤도 잊혀져 버렸다.  상처와 위안이 계속되는 공간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다.  보고 싶은 사람.  되찾고 싶은 시간 때문에 놓쳐버리는 오늘이 반복된다.

 이런저런 모티브들로 삶을 구획해보려 해도 늘 반복하는 말일 뿐.  결국 삶에 명정함은 없다.  그저 흔적들로 삶이 채워질 뿐.  다시 찾아 온 분절의 교차로에 서 익숙하게 담배를 피우고 익숙하게 고민한다.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까.  답을 구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  능숙한 것도 이것 뿐.  주어진 것은 이것 뿐.

 소년은 그대로 골목을 해매이고 있다.  집에 가는 길은 알지만, 공터로 가는 길도 알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는 어제처럼 막막하다.  해가 뉘엿뉘엿지며 황금빛이 찬란한 담벼락 사이로 달려가는 소년이 있다.  그저 골목 사이를 해매이다 보면 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담벼락엔 어제 한 낙서가, 모퉁이엔 그제 놀다 버린 병조각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친숙하지만 아무 것도 내것은 없는 골목에서 어제처럼 소년은 해매인다.  어제처럼, 내일처럼.

 흔적만이 남는다.  되돌아 보기엔 부족하고, 딛고 가기에도 부족한 그 것.  그저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것.  시간은 그리 대단한게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