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04 '하늘'

2010. 10. 25. 07:40잡문/일기는 일기장에



1.
 가을이 다가올 무렵이었던 것 같다.  뒤늦게 더위가 기승을 부려 아직 외투를 걸치지 못할 무렵.  강물은 제법 차가웠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계곡엔 고요와 찬란한 태양이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는 거리를 헤매고 누군가는 지치도록 술을 마신다.  공허는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가장 많이 얻는 것은 결국 공허다.  공허는 생각보다 무서워서, 수많은 부산물들을 만들면서 사람을 빠르게 잠식해 나간다.  사람들은 공허를 잊기 위해 일을 하고, 그 일 때문에 또 공허를 얻는다.  그것은 소위 '살아감' 이라고 불린다.
 그때 난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늘상 만나는 모습이지만 언제나 괴로운 것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업무가 끝나고 얼마간의 휴무가 삶을 지나치고 나면 마음엔 지독한 무의미가 남는다.  늘상 반복된다.  그리고 그 때마다 떠나가고 싶어진다.  여기까진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다.  그리고 이 다음에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  아주아주 평범하다.

2.
 마지막 발걸음이 지나간지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오래된 모닥불의 자취만이 남아있다.  이 강변은 참 조용하다.  숲을 좋아하는 사람도,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할 만한 풍경.  마치 내 방과 같다.
 오래된 구두를 신고-충분히 긁혀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지구의 오래된 유산들이 깔린 강변을 걷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산적한 골동품들을 놔두고 고작 수십 년된 물건들에 절절 메이지" 같은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햇살은 산소보다 충만하다.  지금 난 가득 찬 곳에 있다.  
 솔직한 사람은 이런 감동에 눈물이라도 흘리련만, 난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충만한 오후의 햇살 때문에 외소한 그림자가 발밑에 구겨져 있다.  날 증명할 유일한 그 무엇.  바람이 분다.  이 곳에선 오직 바람만이 말할 수 있다.

3.
 분명 난 사람과 사람의 흔적이 터질듯한 곳에 있었건만, 그 곳은 그렇게도 공허했다.  그곳엔 내가 없었다.  분명 난 그 거리를 걷고, 누군가와 대화하며, 누군가가 제공한 것을 소비했건만, 난 그곳에 없었다.  
 도시에 살면서 깨달은 것은 난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그곳에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동사무소 직원 때문에 난 우리집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핸드폰 매장 직원 때문에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었다.  난 내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난 지워져버릴 것이다.
 난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내 믿음에 불과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와 같다.  결국 난 나란 종교를 믿고 있었던 것뿐이다.  도시에선 내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없다.  조약하게 남은 것은 밤풍경에 빛나는 십자가처럼 외소한 주민등록번호 뿐.

4.
 한참동안 멍하니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엔 무언가가 가득 차 있다.  무엇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  그 고요는 제법 진지해서, 숨소리도 거슬린다.  그 충만한 구조에 갑자기 끼어든 이방인은 갖출 수 있는 예의를 최대한 발휘해보려 하지만 그래도 모자라다.   여기에 있으면 안되는 걸까?  그렇다면 난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데...

5.
 담배를 피우고 다시 차에 올라 비포장 도로를 한참 돌아간다.  이튿날은 할 일이 많다.  서둘러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이럴 때는 시인이나 음악가가 참 부럽다.  마치 멋진 레지멘탈 넥타이처럼, 그들은 아무 때나 훌쩍여도 충분히 멋스럽다-그러나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상관없다-.  애타는 마음을 해소하기엔 눈물만큼 좋은게 없으나 찔러도 피 한방울은 커녕 눈물 한방울도 안나오는 마음엔 담배연기만 가득 차 있다.  
 도시로 돌아가게 되면, 난 재충전을 했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또 공허를 벌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1년 정도 지나면, 또 어디론가 떠남을 동경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진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다.  그리고 이 다음에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  아주아주 평범하다.

6.
 1년 전 이 무렵의 사진을 꺼내든 새벽.  잠 못드는 밤, 도시에 남겨진 그는 누구인가?  난 거기에 없다.  사진 속 강가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엔 내가 없다.  떠날 때가 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