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많이 내린 날

2010. 1. 5. 03:16잡문/메모

1. 옆동네 제천만 해도 관측사상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할 정도로 오늘 우리나라엔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내가 1학년이었던 04년.  3월로 기억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려서 학교 오던 애들이 고속도로에서 고립되는 일이 생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투덜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집앞 도로는 늘 한적한 시골 입구여서 그런 일은 없었기에 조용하고 평온한 눈발만 바라 볼 수 있었다.  눈은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되는 건 하나 없어 보이는데도ㅣ런  미움받지 않는데다 그 차가운 감각적 성질과는 달리 마음을 한없이 포근하게 해준다.  세상에 이런 좋은 오해를 독식하는 것도 흔치 않다.  그리고 오해라 할지라도 눈 많이 내린 날은 괜히 가슴 설레이게 운치있다.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2. 이런 날엔 내가 실업자라는게 마냥 좋기만 하다.  사실 이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실업자기에 가능한 것이다.  올 겨울은 일 안하고 안쓰고 집에서 놀려고 했건만 몇 일 칩거생활을 하다 보니 어떤 행위라도 하긴 해야겠단 생각에 번민했었다.  오늘같이 눈오는 날은 놀자는 각오를 강건하게 해준다.  일 안하고 놀 수 있다는 건 세상 어디에 비할 곳 없는 대단한 사치다.  그것도 요즘같은 때엔 특히 각별하다.

3. 하루사이에 백겔의 선생님들께 '털렸다'.  디씨 인사이드를 다니기는 하나 백겔은 워낙 쟁쟁한 고수분들이 많은지라 정보만 갉아먹었고(이것도 대단한 죄지만 내놓을게 없으니...) 그 과정에서 백겔에 축적된 아카이브의 묵직한 존재감만 느끼고 있었다.  나와 백겔은 그런 관계였는데 이 블로그에 올린 글에 불만을 느낀 분이 백겔에 글을 링크해주셨고(감사합니다.) 백겔에서 친히 원정와주신 분들께 사정없이 나의 무지와 오용이 난도질 당했다.  좋은건, 이렇게 펴보지도 못하고 고사하는 줄 알았던 블로그에 관심의 서광이, 그것도 백겔 선생님들의 후광이 비춰졌다는 것과 그로 인해 까딱했으면 평생 잘못알고 살았을 수 있었던 오해가 제대로 바로잡혔단 점이다.  늘상 자주 접하면서도 잘못된 줄 몰랐다는 건 워낙 관념에 깊이 박혀 있어서 그것이 잘못인지 판단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의적 시도로는 쉽사리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원정오신 백겔분들의 도움에 거짓없이 감사드린다.  마음같아선 귤이라도 한 봉지씩 보내드리고 싶으나 그러면 택배비가 더 나와서 그건 무리고...

4. 오늘 느낀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만 들자면, 예전 같았으면 이런 저런 구차한 별명을 늘어놓으면서 어떻게든 상대방 꼬리를 잡아보려 발버둥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사실 이건 못하는 것에 가깝다.)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인정했다는 것에 내 상태가 예전보단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불만도 있으니, 아직 누군가의 의견을 수용한다는 것이 어울리는 나이는 아니련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젊음의 치기어리지만 맹렬하고 유쾌한 자세가 사그러져 버렸단 점이 스스로에게 안타깝다.  혹시 젊기도 전에 늙어버린게 아닐까, 그러면서 무지만 그대로 있는게 아닐까란 수심에 잠긴다. 

5. 몇 일 허리 스트레칭 중이다.  엎어 누워서 고개를 든 상태로 한시간 정도를 버티고 있는데 당겨지는 만큼 허리가 많이 아프다.  늘 척추가 많이 틀어져 있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운동을 계속 하면 그래도 조금은 좋아지리라 믿는.  요번 겨울엔 일 안하는 만큼 이런 것이라도 신경써서 약간이나마 소득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6. 원래 년초에는 올해에 이루고자 하는 바들을 적어보곤 하는데 작년초에 계획한 일 중 성취한 일이 별로 없어(그것도 목표를 유념하고 있었기에 된 일이 아니라 어찌어찌 하다보니 된 일이였다.) 올해는 특별한 목표 없이 그저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살려는 계획을 다이어리에 적어 본다.  그런데 이 계획도 안될 공산이 크다.  

7. 결국 대주제는 '열심히 살자' 정도면 충분한데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목표도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8. 수정해서, '띄워쓰기와 맞춤법이라도 배워보자' 는 올해의 목표로 삼아보려 하다만 그러면 6번과 상충되는데...(그나저나 '띠워쓰기' 인가 '띄워쓰기' 인가도 가물가물하다.  중학교때 공부를 눈꼽만큼이라도 해두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막심하다.  난 왜 그렇게 헛된 세월을 보냈을까?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9. 다 필요없다.  올해는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 겨울엔 이렇게 눈오는 날에 비박도 할 정도면 된다.  결론이 초인지경이긴 하다만 적어도 전제는 옳으니 그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