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온 사람들이 함께 먹는 식당이 필요하다.

2013. 11. 21. 15:49잡문/이야기


(사진은 본문과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속초 만석닭강정의 사진입니다. 참고로 이 닭강정집이 닭강정계의 원조라고 합니다. 뭐, 그렇다구요.) 


혼자 온 사람들이 함께 먹는 식당이 필요하다.

 

작년 어느 추운 겨울날에 있었던 일이다. 홍대에서 일이 끝났기에 홀로 조폭떡볶이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이 늘 그렇듯 앉을 자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어느 새초롬하게 생긴 아가씨가 내 테이블에 맞은편에 앉았다. 아가씨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자신의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고, 조폭 되게 좋아하시나봐요? 혼자 오셨네요?” 라며 말을 걸었다. 추위에 굳은 아가씨의 표정이 풀리고 가까운 곳에 사는데 야식이 땡기면 와요.”란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식사 내내 대화가 이어졌다. 서로가 먹을 오뎅국물을 받아오고 조금 모자란 것 같아 튀김을 더 시켰다. 바깥 날씨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화기애애하게 떡볶이를 먹은 나와 그 아가씨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가 갈 길을 향했다. 그 후 아무런 뒷이야기도 없다.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기에 연락이 오고 가지도 않았다. 그저 그날의 기억이 기분 좋게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도 홀로 제육볶음을 먹었다. 그리고 홀로 먹을 때면 식당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는 법이다. 회사원들이 많은 곳이기에 나처럼 홀로 먹는 사람이 많다. 젊은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핸드폰을 만지며 밥을 먹는다. 조금 더 연륜이 있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밥을 꼭꼭 씹는다. 베테랑들은 창가자리에 앉아 지극히 익숙한 풍경을 보며 먹는다. 공통점은 다들 말없이 먹는다는 점이다. 당연한 일이다. 홀로 밥을 먹거늘 누구와 말을 하겠는가? 통성기도도 아니건만 어느 허공에 말을 건네겠는가? 다들 홀로 먹고 조용히 먹는다. 그리고 쓸쓸한 등을 보이며 거리로 나선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비단 제육볶음집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중국집도 마찬가지고 햄버거집도 마찬가지다. 회사들이 밀집한 곳에 있어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 예컨대 역삼동이나 종로 등의 동네에 있는 식당에선 더욱 심해진다. 예전에는 과나 계 단위로 함께 식사를 했지만 직장분위기가 많이 민주화가 된 이후로는 홀로 먹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과장님은 집에서도 쓸쓸히 먹는 밥을 밖에서도 쓸쓸하게 먹게 되었다. 그래서 제안한다. 누가 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제안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함께 먹을 수 있는식당을 만들어달란 제안이다.


상상해보라. 오늘도 홀로 밥을 먹는 당신, 문을 열고 들어서 테이블에 앉았다. 제육볶음도 먹고 싶고 청국장찌개도 먹고 싶지만 혼자이기에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고기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결국 제육볶음을 택한다. 그런데 이모가 제안을 한다. “저쪽에 청국장 먹는 삼촌 있으니까 저쪽에 깔아줄게. 삼촌도 괜찮지?” 란 제안을 한다. 삼촌도 흔쾌히 승낙한다. 저쪽 테이블에 청국장 찌개를 먹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밑반찬이 그쪽에 깔리기 시작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쪽 자리에 앉는다. 스포츠신문을 보던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강민호 75억은 오바 아냐?” 그렇게 함께 먹는 식사가 시작된다. 신선한 대화 주제들이 오가는 와중 당신은 제육볶음과 청국장 둘 다 먹을 수 있고 그건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아저씨는 가까운 곳에서 구둣방을 하신다고 한다. 다음에 오면 서비스로 한번 닦아주신다고 한다. 당신이 줄 것은 별 것이 없기에 프레스에 뿌리고 남은 내년 달력이라도 한 부 챙겨드리겠다 약속한다. 요쿠르트를 마신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다. 당신은 제육볶음값만 계산하고 문턱을 나선다. 이모와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던 길을 마저 간다. 이 어찌 아니 아름다운 풍경인가!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먹는 식당은 고립독식사회의 여러 중요한 문제점들을 해결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식객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걸음을 보탤 수 있다. 일단 한 가지 메뉴를 계산하며 두 가지 메뉴를 먹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제육볶음과 청국장찌개의 예처럼 서로의 메뉴를 함께 먹는 이와 나누며 혼자 한 가지 먹을 때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물론 계산은 자기가 주문한 음식값만 내면 된다. 같은 지출로 얻는 만족도는 두 배가 된다. 게다가 이점은 식당주인과 환경에게도 이점을 만든다. 두 사람, 그리고 그 이상의 인원이 먹도록 상을 차리면 볶음요리에 따라가는 국을 따로 만드는 수고가 줄며, 잔반과 로스(예컨대 김치그릇에 붙는 고추가루나 콩나물국에서 남겨지는 파)가 줄어들고 설거지거리도 줄어든다. 덕분에 보다 경제적으로 요리를 다룰 수 있게 되며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함께 먹는 식당은 식객들의 삶을 보다 다채롭게 만든다. 처음 만나는 낯선 이, 혹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와 식사를 나누며 양자는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서로는 일과 삶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상대방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혼자 가는 삶은 함께 가는 삶이 된다. 퇴근하는 길에 식당에서 만난 아저씨네 가게에서 멍이 안 든 사과를 살 수 있고, 그 아저씨는 내가 권한 적금을 들어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작년 사사분기 이후로 끝난 아가씨와의 데이트 자리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질 것에 대한 기대감, 새로운 만남과 관계가 시작될 것에 대한 기대감이 식당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식당사장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원순이형이 좋아하는, 서로 돕는 오순도순한 마을공동체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먹는 식당은 현대인의 실존적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 모난 성격 때문에 사무실 그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회사원, 회사에 직원이라곤 달랑 자기 혼자기에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할 일이 없는 자영업자, 고시원 벽에 여자 사진을 걸어둔 외로운 고시생, 그리고 나 같이 페이스북 때문에 정작 밖에서는 별 말이 없는 페이스북 중독자. 이들은 함께 먹는 식당을 통해 눈 앞에 실존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공유할 수 있다. 서로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누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평안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순간에 혼자는 우리가 되고 우리의 연대감 안에서 실존의 고독은 해소된다. 그리고 삶에 위안과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단 이유를 하나 찾는다. 함께 먹는 식당이 해소해준 외로움은 외로운 이들에게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해주고, 보다 열심히 일상에 임하게 만든다. 결국 근혜누나가 참 좋아하는 경제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게 창조경제가 아니면 뭐가 창조경제겠는가?


혼자 온 사람들이 함께 먹는 식당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모들이 한 발자국만 더 나서주면 된다. 비슷한 타이밍에 각자의 자리에 앉아 서로 다른 메뉴를 시킨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면 된다. 앞서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살갑게 이 삼촌은 제육볶음이니까 청국장이랑 같이 먹으면 좋아. 그러니까 여기 앉힐게.” 정도의 말만 식객들에게 건네면 된다. 그렇게 합석하는 자리가 시작되어 점점 빈번해지며, 결국 식당에 대한 입소문이 생기게 되면 식당은 혼자서도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곳이란 캐릭터가 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이모들은 즐겁고 편하게 사람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거국적인 토건사업도, 교과서 개정도, 외교적 항의도 필요 없다. 그저 이모들이 건네주는 말 몇 마디로 보다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며 서로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아름다움이 가득한 식당과 멋진 사회적 현상이 생긴다.

감히 제안하고 절절히 요청한다. 고개를 묻고 먹지 않아도 되는 식당이 시급히 필요하오니 식당 사장님들께서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혼자 온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식당을 개진해주셨으면 좋겠다. 상수역과 건대 근처에 가면 부킹 술집이 그득그득하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부킹 밥집은 없는 것인가? 부킹 밥집이 필요하다. 혼자 먹으며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식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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