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통화경제체제의 허구성과 극복

2009. 12. 12. 03:58잡문/이야기

 편의점에서 일하다가 율곡의 얼굴에 제법 유치한 낙서가 더해진 예술적인 오천원을 발견했다. 거창한 제목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은 아니고 우연한 일을 모티브로 떠오른 착상이다.

 모티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화폐는 국가의 자산으로 훼손해서는 안되며 훼손시에 법적 처분을 받을 수 있음이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과 화폐가 노동이나 매매의 대가(특히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선 결국 노동의 대가로 귀결된다.) 로서 지급받은 교환가치라는 점의 상관관계가 문제로 떠올랐다. 양자를 연관시키며 중요한 점을 말하자면, 특정한 가치의 대가로 교환되어 주어지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부여된 사적 소유물에 대한 운용의 권리 중 일부가 국가에 귀속된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귀결은 결국 오늘날엔 통화의 귀속적 지위가 원시현물경제에서 의미하는 순수 가치의 대상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회적 기호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수 교환대상에 한정한다면 통화는 설사 변형에 의해 부여된 가치가 하락한다 하더라도(오천원에 낙서를 하면 이천오백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유자에 의해 어떠한 형태로도 변형될 수 있으며 운용의 권리는 소유자에게 온전히 주어져야 한다. 마치 금과 같다. 금은 소유자의 변용과 가공에 따라 18k가 될 수도 있고 객관적 유의미 이상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택할 수 있는 결정권은 전적으로 소유자에게 있으며 그렇기에 결과-거래 가치의 변동-의 손익은 소유자가 책임진다는 구조적 명료함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가 가진 능력은 이래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앞에서 말한 법적 한계와 같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훼손함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건 통화경제에서 화폐의 소유권은 개개의 소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화폐의 소유권은 궁극적으로 발행인인 국가권력에서 떠나지 않았고 단지 개인에게 임차되어 있다. 통화경제의 주도권은 개개인의 노동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의 관계에 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 주도의 시스템(뒤에서 적겠지만 이는 본질적인 허구성으로 인해 보드리야르의 팬텀-메트릭스 개념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에 있다. 결국 통화경제와 관련된 해당자(오늘날 대다수의 사회 내 구성인원이 해당된다.) 는 자의적이고 자득적인 관계로 경제체제에 관계맺음되어 있는 것이 아닌 무지각된 수동적 관계로 복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과도한 일반화의 논리로 비춰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단순한 특정 경우인 훼손과 관련된 경우에서 제공되는 모티브가 그 체계의 전체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티브는 충분히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형식논리적 체계로 말하자면, A의 특성이 완전히 A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A가 아니다. 즉, 화폐가 해야 할 역할을 화폐가 가진 특성이 완전히 수행할 수 없게 한다면 그것은 화폐가 해야하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표현의 어폐가 있으나 그것은 화폐가 '아닌' 것이다. 혹은 적어도 일반적인 이해로 받아들여지는 화폐는 아닌 것이다. 현실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화폐는 그 소유자의 소유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렇게 활용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화폐에 기대하는 당연한 구조적 역할이다. 하지만 오늘날 통화경제체의 본질적인 구조는 이에 반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티브로 인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화폐가 같은 가치의 금이란 객관적 가치와 직렬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국가권력에 의해 가치를 보장받게 된 중앙은행제가 도입된 이후로 화폐의 가치는 객관적 가치가 아닌 국가에 기반하는 유동적이고 수동적인 한정적 가치가 되었다. 국가는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나 그렇기에 화폐의 가치는 통화경제체제의 설계-관리자에게 의존되고 있으며 이점은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무지각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에 위임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 통화경제체제에 기반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 경제권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에 위임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합의 및 권리이양의 결과를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관리권력에 넘겨주었기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허용되었고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무산자인 것이다.

 이런 통화경제체제의 구조는 대중이 자유민주주의란 허상에 기대하고 있는 바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중앙은행권위 기반의 통화경제체제는 어떠한 전제주의나 사회주의만큼이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고 박탈하고 있는 것이며 단지 그것이 자각되지 않고 특정 의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을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펜텀-메트릭스 이론에 대비하여 설명하자면, 사회를 관리하는 권력은 사회를 원하는 바대로 운영하기 위해 드러내야 할 점만을 드러내면서 그것의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 논리적 당위성을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형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메트릭스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펜텀은 우리에게 당연하고 객관성있는 '사실' 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진실은 오직 허상의 체계하에서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존재하지 않지만 보인다고 믿어지는 손이 존재하는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지도록 조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의 노동이 노동주체와 다방면으로 유리되어 있다면서 노동소외론을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노동은 노동주체가 추구하는 노동의 결과물에서, 노동의 목적성에서, 그리고 인간이 온당히 지향해야 할 인간성 자체에서 유리되어 있다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에게서 유리되어 있는 인간성이 복귀된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자본주의체제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가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하면서 든 문제점도 통화경제체제의 문제점과 연관되어 있다. 법체계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하며 현실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법체계의 구조적 형태이나 현실에선 통화경제체제의 영향력이 현실을 구획하고 구성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백년전에 비판했던 이런 문제점들을 오늘날 자본주의 통화경제체제에서도 음습한 망령으로 남아 있으며 유물본위의 본질적 인간성의 회복도 느껴지는 바와 같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앙은행기반의 통화경제체제는 허위성이 근본적인 성격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그리고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특성으로 인해 현실의 물적 가치 지향을 부정하고 이에 기반하는 인간적 가치를 제한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을 경쟁하게 만들어 냉정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오늘날의 통화경제체제가 가진 허위성이 결합되면 결국 인간은 허황된 목적을 위해 인간성을 소모시킨다는 부조리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현상적인 실존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시지포스적 노력이다. 허위성의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소모되는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목적, 즉 통화경제체제의 허위성을 극복한다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문제의식이란 돌덩이를 밀며 끊임없이 산에 오르는 문제제기의 과정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긍정적으로 바라봐져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논리와는 모순적이지만, 인간은 인간이란 특성으로 인해 실수를 가다듬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긍정적 의미의 시지포스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으면서 목적에 도달하는, 탈 시지포스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역사에서 인간은 과정에 있어야 하며 과정에 있다. 그리고 결론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선 안된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그렇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포스트모던의 지향점은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선 극복의 방향을 설정하는 명시적인 방법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사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순 없다는 관점에선 오늘날의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구획의 설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런 관점에 대해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설정할 수 없다. 이와 다르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개선방향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며 접근하는 관점은 다양한 방법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기에 명시적인 방법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독단적인 정언명법이 아닌 많은 논의와 시도에서 보다 좋은 합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한 귀납적 축적은 보다 현실적인 안을 설정할 수 있기에 객관적이지 않은 연역적인 법칙을 제시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통화경제체제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이론은 문을 열어두고 방을 비워두려 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특성을 믿고 인간이 인간다움이란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며 오늘날은 역사에서 과정에 불과하다고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