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레이서 / Speed Racer. 2008.

2011. 7. 21. 22:49잡문/이야기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성공적인 결과는 워쇼스키 형제에게 차기작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한을 제공했다.  다만 심각한 주제의식과 복잡한 플롯, 방대한 기초자료가 결부된 무거운 서사시였던 전작으로 인해 평단과 대중, 헐리우드의 투자자들은 워쇼스키 형제의 차기작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모두의 기대와 작가의 권리가 상충될 때, 워쇼스키 형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영화를 꺼내놓는다.  


 '당신의 상상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란 문구는 대단히 적절하다.  이 작품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작품임이 분명하다.  아시다시피, 평단의 반응은 참담했고 대중들은 외면했으며 투자자들은 손익 계산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빠졌다.  다만 이 혼란 속에서도 워쇼스키 형제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스피드 레이서는 단순한 졸작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설계된 작품이다.

 모든 면에서 이 영화는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전작이 염세적인 디스토피아와 심도있는 철학적 논의의 결합이었다면, 이 작품은 찬란하고 화려한 영상과 아주 간단명료한 시나리오의 결합이다.  전작이 두 번, 세 번을 보아야 하고 그 내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영화였다면, 이것은 '반 번' 만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오직 작품만 두고 비교한다면, 두 영화는 아무리 보아도 같은 감독의 영화로 보여지지 않는다.  스피드 레이서는 감독의 전작과 완전히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이러한 괴리로 인해, 대다수의 평론은 이 영화에 대해 참혹한 비판을, 많은 대중들은 참담한 실망감을 표했지만 영화가 나온지 한참이 지난 이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기에 이런 비평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이 영화는 그 형식면에서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다.  단순하게 설계된 스토리인 만큼 그 완결성에서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며 플롯은 대단히 유려하다.  그리고 대자본과 멋진 센스가 투입된 작품인 만큼 영상미는 압도적이다.  결국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상으론 그 문제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피드 레이서를 다루는 관점은 '문제' 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논제' 로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워쇼스키 형제의 치열한 작가 정신에 있다.

 결국 워쇼스키 형제는 이 영화를 매우 자의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평단, 대중, 자본 등의 모든 이해 관계가 무시될 정도로 이 영화는 주관적인 작품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차기작을 위해 주어진 무제한의 권능을 일반적인 헐리우드 흥행 감독이 밟아나가는 과정을 정면으로 무시하며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프로덕트' 가 아닌 '영화 예술' 이란 명제를 지향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작품이다.  너무나 뻔하고 너무나 황당무계하기에, 그렇기에 주류와 노선을 달리하는 '예술' 이 탄생한 것이다.

 현대 예술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의 아우라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상과의 관계와 차이에서 그 대상은 그 특수성을 발휘한다.  아시다시피 현대 미술은 고전 예술과 달라, 그 압도적인 균형감과 묘사, 회화로서의 완성도로 인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실크 스크린으로 수십장을 찍어낸 기법이라 할지라도 이전에 시도한 사람이 없으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단순한 영화, 혹은 형편없는 졸작으로 치부받기엔 그것의 특성과 차이점이 분명하다.  이는 스피드 레이서가 졸작이 아닌 분명한 의도에 의해 섬세하게 설계된 작가주의적 '작품' 으로 읽혀져야 하는 근거가 된다.  앞에서 말한 바 대로, 워쇼스키 형제는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로서 차기작에 접근한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작가로서 접근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행위에 있어 객체들은 중요치 않다.  현대 예술은 얼마든지 자의적이어도 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현대 예술의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 하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능력을 충실히 사용했다.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총 천연색 만화경이다. 모든 것들은 눈을 어지럽히는 아름다운 세계면서 그 안에 이야기는 단촐하다. 그리고 이는 현대 미술이 가진 일련의 특징들과 일맥상통한다. 워쇼스키 형제의 괴작(?)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재적 무의미는 외재적 유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 형식 자체의 특성은 내용의 완성도 만큼이나 중요하단 점. 그리고 영화는 상품의 범주에도 들어가지만 예술작품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스피드 레이서의 총체는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잭슨 폴락이 캔버스에 뿌린 물감들처럼 말이다.   

평점 4/10 - 재미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