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2009. 11. 17. 22:16두 바퀴/만지다


1. 진리까지는 아니고 대략 맞아 떨어지는 이론이다.  한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어떤 방식이 있으며, 그 방식의 특정 하위 부분의 개선의 여지가 있어(반대로 말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문제가 있어)그 것을 개선하려고 시도하면 특정한 부분의 개선으로 인해 다른 부분의 성능이 떨어지거나 그 방식의 전체적인 벨런스가 붕괴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간단한 실례로는 부품에서 무게와 강도, 이외의 기능적인 성능은 일정 수준 이상의 단계에선 분명히 반비례로 대응한다.  무게를 덜면 덜수록 부품은 약해지고 섬세하게 조정해주어야 하며 기능이 떨어진다.  구조적 변화를 통해 다른 개선안을 제시하려고 하면 원래 의도했던 바에 못 미치거나 결과 자체를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는 거시적으로 덩어리가 큰 부분부터, 미시적으로 케미컬적인 부분까지 넓은 범위에서 적은 적용범위를 막론한다.

 결론은 이전의 방식을 어느정도만이라도 큰 반작용 없이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은 설사 그 결과물이 간단하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대단한 고심과 연구의 결과라는 것이다.  예를 또 들자면 스템의 경우, 퀼 스템에서 어헤드 스템으로의 전환이 사용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크게 복잡해 보이지 않고 기능상 큰 변화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간단하게 말해 별거 아닐지라도), 막상 다른 대안을 찾아보려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 적절한 체계 변화인 것이다.  스템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온전히 가져오면서 피팅과 경량이란 개선점을 제시한 어헤드 스템의 방식은 대단히 긍정적인 전환 사례고, 그 저변에서는 개발자의 대단한 고민과 계승, 연구자들의 수많은 손길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론을 대입가능한 사례들은 너무나도 많고 자전거를 알면 알게될수록 크게 느낀다.

 고민을 많이 하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다.  얼마나 깊게 하는지도 중요하다. 

2, 집으로 오는 길에 든 생각.  스프라켓, 체인, 체인링등을 소모성 구동계로 치는데 일반적인 메터리얼로 재작된 경우 어림잡아 평균 4000~5000km 정도의 주행량을 커버할 수 있는 부품이 과연 소모성 부품인가를 의심해보게 됬다. 

 4000~5000km를 견뎌낸다면 나같이 하루 10km미만 정도의 적은 주행을 하는 사람은 1년반이 넘는 기간을 타고 다녀야 노화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장기간 운용후엔 위에서 뽑은 소모성 구동계 부품외의 컴퍼넌트들도 많은 노화증상, 혹은 주행중 경미한 사고로 인한 파손이 높은 확률로 발생할 수 있을 것이고 수리, 정비 및 교체를 해야하는 경우도 필히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이론적 체계가 적합하게 실재 자전거 운용을 설명할 수 있다면 결국 모든 자전거 부품들은 소모품으로 치환할 수 있다.  심지어 프레임도 그에 해당된다.  크로몰리 소재는 그나마 덜하겠지만(이건 대신 녹이 생기고 철이 휜다.) 알류미늄의 경우 탄성이 약한만큼 많은 주행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크랙으로 전개될 수 있고,  4000~5000km를 소화하는 동안 누적되는 스트레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터이니 결국 프레임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소모품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결국 자전거 자체가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현재 소모품으로 규정되어 있는 부품은 내구성에 한계가 짧기에 특별 분류해야 한다는 관념이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적, 매니악하게 자전거 주행에 종사하는 입장이 아닌 나정도의 주행거리를 소화하는 사람에게 사, 오천 킬로미터는 굉장히 긴 주행거리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바 대로 이 긴 주행기간을 소화하는 동안엔 현재 암묵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소모성 부품 외에 부품들도 파손이나 명시되지 않는 노화와 같은 외재적 소모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특별히 소모성 부품을 설정하고 특별 대응함이 결국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문제는 가능성이 얼마만큼 확실하느냐에 의해 발생하는 차이긴 하다.  구동계는 직접적으로 마모와 같은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 구동 체계상 확실하기에 가능성이 논리적 근거를 가진다.  이에 반해 다른 부품들은 변화할 가능성이 열려있을 뿐 그 작용인을 논리적 근거로 설정할 수 없기에 가능성을 책정할 수 없단 문제가 있다. 

 결국 아무래도 헛소리같긴 합니다.  오늘 보드리야르와 초미학에 대해, 정확하게 '예술의 소멸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될 때' 라는 주제를 강독하고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