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2011. 3. 11. 08:20잡문/이야기


 다큐멘터리 중 'Helvetica(Gary Hustwit , Geoff Wonfor. 2007)' 란 작품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무런 인지 없이 사용하는 폰트 헬베티카를 다룬, 극히 단순하기에 극히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풀어나가는 다큐멘터리다. 아주 즐겁게 본 작품이니 말 그대로 '형식 그 자체' 인 주제로 다양한 '내용' 을 이끌어낸 작품이다. 일단 모든 수작 다큐멘터리들과 마찬가지로 주제를 단순히 소개만 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과 그에 따르는 해석들을 제시한다는 점이 좋았고, 거기에 주제에 대해 한 발자국 물러서 제법 건조하게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이 특별한 후자가 깊은 울림을 갖는 것은 주제를 다루는 관점이 은연 중에 헬베티카의 성격을 따라가기 때문. 아무런 성격없이 읽혀질 수 있는 폰트를 통해 다양한 생산자 주관의 컨텐츠들이 펼쳐질 수 있는 것처럼, 영화는 단순한 양식을 통해서 다양한 관점들을 제시하고 감상자가 열린 판단을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영화 자체는 어떠한 가치 판단도 제시하지 않고 무미건조하다. 결국 그것에 특정한 기의를 투영하는 것은 감상자가 된다. 이는 극히 자유지상적이다. 

 우리에게는 형식이 폭력적이란 인식이 은연 중에 박혀있다. 특히 형식이 체계적일수록 인간을 족쇄에 옭아 맨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는 수많은 창작들을 거세시켰던 '검열' 에 근거하는 것 같다. 분명 우리의 역사에서 윤리와 도덕(혹은 이런 것으로 위장한 지배 논리) 이란 관점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이로 인해 우리는 '형식' 이라는 것이 집단 주관에 근거하는 일종의 '재단'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가까운 역사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퇴폐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근래에는 다수와 다른 성취향을 가졌고 그것을 공개했다는 것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집단의 의지' 란 무형의 주체가 제시한 도덕률이며, 이 집단의 미래를 위해서 집단 자체를 다듬다 보니 생긴 '형식 외의 것' 이라 여겨져 왔다.

 하지만 형식은 그렇게 잔인무도한 압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형식의 원초적 근간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개발한, 일종의 '도구' . 물론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의 역기능이 인간을 위협하는 경우가 간간히 있긴 하다만, 대체적으로 이러한 목적을 두고 있는 것들은 그 목적에서 이탈하게 되면 자연히 소멸하거나, 다른 형태로 전환된다. 예시로, 언어(Language. 인간 행위 총체가 아닌 단순 언어) 1차적 목적은 '소통' 인데, 이 기능을 잃은 언어는 사어가 되어 사라진다(오늘날의 라틴어는 언어가 아닌 '과거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 가 아닐까? 이런 형태 전환의 궁극적인 예시로는 고대 이집트어가 있다). 인간이 발명한 것의 대체적인 존재론적 흐름이 이와 같건만, 만약 형식이 인간을 불편하게만 한다면 아직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설마 인간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것을 창조했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형식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전제 하에서 따져보면 그것의 본래 목적은 결국 '생산성의 증대' 일 것 같다. 일단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는 과정을 도식화시켜 상황마다 적용할 수 있다면 개개의 경우에 맞춘 개개의 시도보다 수고를 덜 수 있으며, 다가올 경우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집단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이다 보니 공동의 목적을 보다 능률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 공유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기 위해선 담을 형식이 필요하다는 점도 있다. 결국 목적에 가장 수월하게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형식을 창조한 것이다. 유태의 오래된 격언에, 자식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본래 시사점은 아시다시피 '자녀에게는 물질적 유산보다 교육이 유산으로 합당하다' 란 점이긴 하다만, 여기에서는 '물고기' 라는 개개 상황에 대한 대응 보다 '물고기 잡는 법' 이란 양식화된 수단을 전수하는 것이 보다 높은 생산성을 창출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해보려 한다. 형식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창조되고, 교환되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Autumn Rhythm'(Number 30). Jackson Pollock. 1950

 도대체 무엇을 그린 그림인 줄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다음 그림도 보자.

'Mona Lisa'. Leonardo Da Vinci. 1503~1506

  적어도 우리는 이 그림이 여자를 그렸다는 점만은 알 수 있다. 이는 다 빈치가 뚜렷하게 인간을 닮은 이목구비와 긴 머리, 골진 가슴 이란 기표-'여성' 이란 기의를 표현하는- 를 통해 그림(기호)을 그렸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기표를 공유하기에 기호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성' 이란 기호를 목적으로 하는 정보를 구획하는 형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로 폴락의 그림에서 우리가 지칭하는 대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폴락이 타인과 공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기표를 통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의 형식을 배운다면 폴락의 그림을 폴락의 의도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바닥에 놓인 캔버스 위로 패인트 버킷을 들고 다니며 물감을 뿌려 의도되지 않은, 하지만 역동적인 흐름을 표현했다는 점을 안다면 우리는 폴락의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 감각적 쾌감의 발현이란 주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없이 단순하게 주어진 폴락의 그림에서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읽을 수 없다. 그의 형식이 공유되지 않고, 그렇기에 그것은 객관적 무형식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용자는 단지 주어진 대상에게 개개의 독립된 기의만을 부여할 수 있을 뿐이며 이는 영속성과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다(역으로 모나 리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그려진 대상이 여자임은 알 수 있지만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없고, 그렇기에 눈썹이 없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도 다양한 해석이 부여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형식 유, 무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형식의 발전도 결국에는 보다 높은 생산성을 창출하기 위함에 근거한다. 또 다시 예시로 언어를 들자면, 우리는 서로 간 의미를 달리할 수 있는 제스츄어(상위 언어)로 소통하는 것 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그리고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자나 말(하위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엄지를 내미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성적인 모티브의 은유, 혹은 심각한 경멸의 표현이지만 브라질에서는 산 위로 해가 떠오르는 것의 묘사, 즉 칭찬의 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르는 브라질 사람과 나의 소통은 단절된다. 하지만 만약 그 브라질 사람과 내가 'Fuck You' 란 문장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일치된 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싸우자 이거지). 그리고 'Fuck you' 란 문장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내미는 것' 이란 행위와 그것의 역사적 근간, 한정적 사회의 통례, 문화의 상대적 특이성에 대해 깨달아야 하는 일련의 행위보다 훨씬 배우기 간단하다. 결국 또 다른 형식이 생기고 기존의 형식에 하위 형식이 생기는 것도 결국 목적을 보다 편리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뒤에 사피엔스가 한번 더 붙는 오늘날의 인간에게(요즘에는 여기에 사피엔스 하나를 더 더하거나, Neo-Man 이라 부르며 구분점을 두려고도 한다) 어느날 갑자기 '형식' 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진다면 과연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까. 아마도 그것은 혜성이 충돌하는 것 만큼이나 파괴적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형식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땔래야 땔 수 없는, 일종의 무형의 신체가 된 듯 하다. 이는 본성에서 제도를 배워가는 호모 사피엔스와 달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제도를 통해서 제도를 배우기 때문이다. 즉 호모 사피엔스가 계속 창으로 찔러보니 사슴이 죽는 것을 깨닫는 것과 우리가 주앤류 토익 책을 통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의 차이다. 대상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아담의 언어' 가 주어지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는 그것 만큼의 기능을 발휘할 수단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을 객체로 두고 관계하는, 분석의 대상으로 관계 정립을 설정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관점은 형식의 형성시키는 동시에 형식 그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역기능으로 인해 우리는 형식을 함께 하기 불편한 것으로, 다분히 감정적인 이해의 대상으로 은연 중에 받아들여 왔다만, 사실 형식은 우리의 삶 어디에나 있으며, 삶의 시작부터 아무래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총체적 행동 양태에는 프로이트 식의 '무의식적인 본성의 작용' 보다는 언제나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형식의 영향력이 더 크다. 우리는 좋은 착상을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올리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서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이 모양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표현' 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사유를 가장 적합한 형식에 맞추어 발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표현이라는 '양식화된 행동' 이 가능해야지만 그것을 꺼낼 수 있고, 제시할 수 있으며, 남겨둘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증명함은 형식의 과정을 거침으로서 가능해진다.

 물론 형식의 관점, -객체 관계란 설정에 '본능적' 으로, 혹은 능동적으로 반대하여 형식의 틀을 벗어나거나, 새롭고 보다 포괄적인 형식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예술의 경우에서라면 앞에서 예시로 든 폴락이나 쇤베르크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런 시도들은 인간의 본성을 보다 넓게 바라보며, 모든 존재를 독립되고 평등케 한다는 점에서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 존재를 분석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그것이 나와는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는, 나와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여김을 의미하며, 이는 원론적으로는 주-객의 관계이나 힘의 평형이 깨져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되면 주-종의 관계로도 이어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이러한 전이의 부정적 예시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열강의 신세계(이 분류 자체도 서열구조에 근거한다)에 대한 침탈이 바로 그것이며 이에는 주체 나름의 정합한 대의명분이 따랐다. 코르테즈가 아즈텍을 멸망시킨 이유에는 자국 에스파냐의 번영이 아니라, 인신공양 풍습이 있는 '야만한' 민족을 개화시키고 기독교의 고귀한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앞선다. 이는 자신의 세계와 아즈텍의 세계를 주-객 관계로 보고 이를 통해 분석하여 결과적으로 이성과 야만의 관계로 이해하게 된 관점에 근거한다. 형식을 통한 분류와 분석은 이렇게 부정적인 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이에 대한 근거 있는 반대를 제시한 경우도 많다. 체계란 명제와 그것에 대항하는 대립명제의 충돌은 비단 정치적인 문제, 독제와 폭력에 대항하는 자유와 민주처럼 거대한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잭슨 폴락 등의 현대 회화의 경우에서나, 조성이 없이 으뜸음이 없기에 그에 종속되는 지배음도 없는 음악을 만든 쇤베르크의 경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형식의 역기능이 발생하는 이유를 찾아본다면, 형식의 체계에는 개개의 대상이 가진 모든 정보를 포함시킬 수 없다는 점이 있다. 형식은 개개의 대상들을 집합시켜 그것들이 가장 많이 공유하는 특성을 통해 그것을 일반화시키거나, 형식을 다루는 주체가 취하려고 하는 정보만을 다룬 뿐이다. 분명 모든 정보를 통섭하여 이해하는 것은 형식의 능력을 넘어선다. 대상의 총체를 빠짐없이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특정한 수단 없이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는 대상과 주체가 개체와 개체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 서로를 완전히 공유할 수 있는 소통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아담의 언어' 에서만 가능하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대상의 완전한 총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무리 깊은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심리와 정서까지는 인식할 수 없다. 그저 어렴풋이 알거나, 어렴풋이 안다고 지래 짐작할 뿐이다. 이런 한계는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창조한 형식을 통해서 구성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우리의 형식은 앞에서 말한 '생산성의 증대' 를 위해서 가장 합리적일 것 같은 요소들만을 취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시, 공간적 한계로 인해 탈락된다. 언어는 이런 형식의 특성에 준하기에 상대방의 시시콜콜한(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을 무시한다. 결국 형식이라는 인간의 도구는 인간과 대상의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창조된 것이며, 그것의 능력은 분명 전능하지 못하다. 

 이런 한계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형식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논의가 등장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그 등장 배경에는 형식과 관계된 이성의 역기능에 대한 성찰과 이성에 대한 회의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로 인해 대체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들은 형식의 메타 범주에 대한 회의를 담은 경우가 많고, 이는 형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대표적으로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의 경우 기표는 기의가 이미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수용자의 해석(새로운 기의)에 따라 기호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는 인간 행위의 총체와 그것으로 인한 현상에 특정한 체계가 있으리라는 믿음 자체가 부정되며, 이로 인해 모든 개체가 주체로 자립하는 해체주의의 관점에 기인한다. 형식은 앞에서 설명한 바 대로 그 구조적 성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체계를 형성시킬 수 밖에 없으며,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이분법적 구분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런 구조화(그는 이것을 현존의 형이상학이라 부른다)를 통한 1:1 의미 부여가  폭력적 서열구조를 창출한다고 보고 다양한 개념들, 예컨대 앞에서 말한 바 대로 기의가 부여되지 않은 기표는 고정된 한정성을 가지지도 않기에 그 거취를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다는 '산종(Dissemination)'의 개념이나 대상이 다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의미를 획득한다는 '차연(Diffrance)' 의 개념, 이런 활발한 움직임과 교류를 텍스트(데리다는 모든 대상을 텍스트로 본다) 의 본래의 특성임을 말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등으로 세계를 다시 인식하려 시도한다.

 이처럼 비단 우리의 무의식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이론에서도 형식에 대한 우려와 반대는 많다. 그리고 비판에 근거한 새로운 관점은 오늘날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칸트 식 구분에 따르면 취미판단의 범주에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꼭 생산성과 결부될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그것은 주관에 근거해도 무방하며,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수용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기의가 대상에 부여될 수 있다(칸트와 해체주의의 대타협!). 이런 특성은 그 분야를 '유희' 에 근거하는 모든 행위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며 실질적인 경우로는 동시대(Contemporary) 예술의 특성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오늘날의 대체적인 미술 작품은 고전 미술과 달리 더 이상 어떠한 대상성을 가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작가가 의도해 둔 특정한 내용을 담지도 않는다. 결국 가치의 판단을 유보하여 수용자에게 이관한다. 데미안 허스트(Demian Hirst) 의 작품 'Mother and Child, Devided' 에서 우리는 어떠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까? 작가의 지상 명제는 그저 시각적인 충격을 제시하여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에 한정한다. 여기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큐레이터와 경매 중계인의 몫이다. 그의 작품에 붙는 수백억 원의 가치는 작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용자에 의한 것이다. 미술 뿐만이 아니다. 명확한 주제의식과 목적으로 '설계' 되었던 바로크 고전음악과 달리, 낭만파를 거쳐 현대에 도달한 음악은 더 이상의 중심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스트라빈스키 이후의 현대음악은 작곡가의 감정적인 동요와 무의식, 의도된 무의미의 중첩이 아주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는 곡의 연주와 해석에 있어 많은 부분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동일한 곡이라도 지휘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청자가 듣는 반응도 재 각기 달라진다. 심지어 녹음을 모노로 했는지, 스테레오로 했는지, 혹은 바이노럴로 했는지에 따라 그 인상은 얼마든지 달라지고 그에 다른 해석도 변화한다. 이런 현대음악의 특성이 정점화된 장르는 바로 재즈다. 60년대에 등장한 프리 재즈는 곡에서 오직 도입 주제만을 제시할 뿐 곡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연주자도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악보도 없고, 같은 곡도 녹음한 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듯 형식을 준수하지 않기에 감상에서도 형식은 없다.

'Mother and Child, Devided'. Demian Hirst. 1993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 대로 형식이 본디 인간을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능력을 보다 확장시키기 위해 등장했으며 아직까지 그것이 기능을 확연히 발현하고 있다는 점은 형식을 마냥 비판의 대상,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을 구속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비판의 입장을 제시하기 직전에 적었던 바 대로, 형식은 우리의 삶 총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확인한다. 특히 실존의 문제와 깊이 관여하는 만큼 형식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커진다. 이는 형식 본연의 목적, '생산성의 증대' 에서 말하는 생산이 극히 현실적인 대상을 목적으로 했으며, 지금도 그러함에 근거한다. 앞서서 취미판단의 범주, 즉 유희를 목적으로 할 경우에서는 형식이 그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유희의 본질적인 성격이 '잉여 활동' 이기 때문이다. 잉여 활동은 실존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찾아온다. 즉 배가 불러야 노래가 나옴을 말한다. 일반적인 경우에서, 어린 아이의 그림에서는 명확한 형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과 로봇은 잘 구분되지 않고, 중요한 인물은 집보다 훨씬 더 크다. 이는 어린 아이의 그림이 명확하고 실질적인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대상을 지향하기 때문인데, 대다수의 유년기 아이들에게 세계는 실질적인 관계의 대상이 아닌 유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아이에게는 현실 대상과 그 이외의 것 간의 명확한 경계가 확립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실 대상을 지향해야 하는 명확한 동기가 없다. 그렇기에 어린이는 자유로운 유희에 세계를 손쉽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은 목적(혹은 대상) 을 둔 그림, '묘사' 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사의 대상은 형식의 틀을 통해서 인지되어 그림에 발현된다. 각 구성물들이 명확한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소실점법을 깨달았다면 그를 통한 구도가 갖추어지며, 대상의 성격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특정한 모티브가 부각되어 그려진다. 예컨대 자동차의 바퀴는 4개가 달리게 되고, 건물은 인물보다 훨씬 더 커진다. 목적을 둔 그림은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가 아닌 냉정한 형식을 통해 발현한다. 형식을 통해서 세계와 관계하게 되고, 취하고자 한 정보를 통해 대상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모티브로 삼게 되는 것이다.

 형식은 관계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을 명확하게 한다. 형식을 통한 관점은 대상과의 관계를 현실적인 범주에 한정시키며 이를 통해서 수용자를 현실에 정착시킬 수 있게 한다. '생산성의 증대' 는 이 점에 근거한다. 형식을 통해 다루어지는 것은 현실적인 대상에 한정하며, 이런 대상들의 귀납적 축적을 통해서 일반화가 이루어진다. 이 일반화된 정보가 바로 지식, 목적에 도달함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인 것이다. 이 도구가 형성되고 기능하는 과정을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축적된 정보를 토대로 제작된 설계도를 통해 가공, 제작된 십자 드라이버가 나사를 돌릴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 드라이버로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즉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식의 기능은 질적 차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형식의 단점으로 꼽은 것 중에 형식의 구획 아래에서 정보의 양이 제한된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장점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인간의 뇌가 가진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 물리적인 규모는 한정되어 있으며, 동시에 활용 가능한 규모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시험 기간마다 경험해 본 바와 같이 분석 가능한 정보의 총량을 넘어선 정보는 오히려 분석을 방해하기에, 형식은 그 틀을 통해 유입되는 정보의 양을 분석 가능한 정도로 분석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과정에서 형식의 틀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려 한다. 분석이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시키거나, 유희의 분야로 이관시킨다. 현실적인 목적(그것이 설령 주관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을 두고 접근한 정보라면 형식은 오직 그에 정합한 것만을 틀을 통해 걸러낸다. 이런 식으로 형식은 또 한 번 생산성을 증대시킨다.  

 또 형식은 인간의 행동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글의 서두에서 설명한 바 대로 지식 및 의사표현과 같은 모든 형태의 교환-소통 활동은 형식을 통해 구성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경우와 집단에게 해당되는 경우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텍스트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문자' 이 있어야 하며(형식 주관. 그 문자가 설령 필자만이 알아볼 수 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는 있어야 한다), 타자와 의견을 교류하기 위해서는 '언어' 가 있어야 한다(형식 객관. 그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최소 두 명은 있어야 한다). 본능에 기인한 일련의 특수한 경우들을 제외한 대체적인 행동들은 이처럼 좁건, 넓건 간에 형식을 필히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적으로 은연 중에 형식을 홀대하고 내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분명한 것은 양자가 그 우, 열을 가리기 어려운, 행위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란 점이다. 즉 특정한 의식화된 행위를 위해서는 형식이 꼭 필요하단 말이다. 아무리 형식이 멀끔 하더라도 내용이 형편없으면 무의미 하단 것을 알듯이,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내용, 즉 컨텐츠는 형식, 즉 폼을 통해서 전달되고, 공유되고, 인지되는 것이다.

 
이 점은 심지어 취미판단-유희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주관적 사유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것을 행동으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형식화된 방안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기존의 미술 양식을 벗어나는 미술이라 할지라도 캔버스 위에 그리거나 오브젝트를 설치한다는 기본 형식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레이디 가가가 아무리 옷을 괴팍하고 헐벗게 입는다 하더라도 '옷을 입는' 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특성은 메타 범주로 넘어가도 형식의 포용범위를 넓게 하여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어떠한 예술적 활동이라 할지라도 그 것이 직접적인 생산과 연결되지 않는 물리적 표현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예술, 유희 '표현' 의 형식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대체적인 행동, 혹은 대체적인 인간의 활동은 필히 형식을 거쳐야지만 발현된다.

  마지막은 형식을 위한 변명을 해보려 한다. 형식으로 인한 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실례들을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공감한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난 형식의 긍정적인 미래를 꿈꾼다. 일단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형식은 하위 형식을 만들거나 형태를 변하는 방식 등으로 발전해가고 있으며, 앞으로의 다가 올 형식은 과거의 그것보다 나은 것이리란 믿음이다. 과거에는 분명 불분명한 법으로 인해 불분명한 처분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거에 비해 비교적 객관적인 법이 통용되고 있기에 불합리한 처벌이 많이 줄었다. 이런 식으로 형식은 점점 다듬어져 가며 나아져 갈 것이라 믿어 본다. 그리고 이런 발전을 토대로 완전한 형태의 형식, 일종의 Universal form 이 마련될 수 있다면 그 형식이 포용하는 광범위한 범위 위에서 인간은 충분한 자유를 편리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다. 이는 마치 동일한 컴퓨터를 사용하여 이문열은 베스트 셀러 소설을 쓰고 필자는 이런 졸문을 쓰는 것과 같다. 컴퓨터란 편리한 도구(형식)은 주어졌지만 그것이 창작의 자유, 적어도 작문의 형식 내에서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형식이 확장된다면 언젠가는 하고자 하는 행위를 모두 도울 수 있으면서도 어떠한 물리적 제한도 두지 않는 형식이 등장할 수도 있으리란 희망을 품어 본다.

  분명 형식은 지금까지 그것이 남긴 역기능들로 인한 많은 우려가 있고 불명확하지만 분명한 심리적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형식-마치 헬베티카 같은- 속에서 살아간다. 이 글은 HTML 언어를 통해 작성되었으며, WWW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이 제안한 양식에 근거하는 전산망을 통해서 전송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220볼트로 동작하는 컴퓨터를 통해 굴림체로 작성된 이 글을 보고 있다. 그저 그것이 너무나 친숙하여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형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특정히 눈에 뜨이는 형식에 절망하기도,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형식은 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형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함께하며 편의를 제공해주는, 내 주변의 친숙한 형식에 대해서 난 긍정적으로 대해보려 한다. 결국 형식은 공기와 비슷하니, 인간이 없이 살기는 어려운 것이여서 그렇다. 가까운 것을 적으로 돌리는 불편을 겪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